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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2024년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소망 - 장동민 교수
한복협  2024-01-17 11:33:54, 조회 : 84, 추천 : 29

                                     포스트코로나 시대, 세상과 교회




                                                                      장동민 교수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서 론: 세상과 교회

        “팬데믹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반성(reflect)하고, 새롭게 상상(reimagine)하고, 새롭게 시작(reset)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의 창을 모처럼 열어주었다.” 세계경제포럼의 창시자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의 말이다. 이는 대한민국 기독교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팬데믹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으나 감지하기도 어렵고 고치기는 더욱 어려운, 우리 세계와 교회의 모순적 실상을 집약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을 주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 의미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소수이고 그 기회도 아주 잠깐 주어질 뿐이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지난 2년 6개월간 아무 소득 없는 고통만 당한 것이다. 이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팬데믹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영향을 주었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2천 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늘 문제가 되어 왔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교회는 지속적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세계의 변화가 교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팬데믹 이후 변화된 세계 속에서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 이것이 이 글의 주제다. 이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상과 교회에 관한 성경의 원리부터 정리하려 한다.
        
        세상과 교회, 애증(愛憎)관계
        성경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사랑하라고 할까, 미워하라고 할까? 한국교회 성도들은 아마 세상을 미워하라는 본문에 익숙할 듯싶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이 세상의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뿐,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거나,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아야 하고, 오직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도 많이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이 땅에 햇빛과 비를 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명을 아끼신다. 마침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냄과 같이 아들도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다른 한편 세상을 미워해야 한다.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잘 정리해 주셨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존재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in) 있도록 하셨지만,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of) 말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17:11,15,16,17)
        “세상에 있다”는 말은 단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의 훨씬 더 적극적인 삶을 요구하신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며, 세상일에 참여(engage)하기 원하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상과 분리(separate)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속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이런 이중적 삶을 사는 것, 이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며 숙명이다. 그리스도인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같다. 간호사는 코로나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슈퍼 감염자라 할지라도 가야 한다. 동시에 그 간호사는 보호 장구를 착용함으로 환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환자와 간호사를 분리하는 것은 얇은 막의 가운과 얼굴 가리개다. 참여하지 않으면 환자를 돌볼 수 없고, 분리되지 않으면 그도 감염되고 만다. 얇은 막에 구멍이 나거나 빈틈이 보이면 영락없이 감염된다. 참여와 분리, 참으로 어렵고도 위험한 과업이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어려운 과업을 맡기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분리된 삶을 삶으로 어떤 열매를 기대하는 것일까?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본다. 첫째, 우리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원하신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뿐 아니라, 공공의 제도와 조직에서 정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주기도문의 표현을 빌자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천국이 이 땅에 세워지며,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사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꺼린다면, 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우리가 세상에 참여하기를 거절한다면 매 주일 외우는 주기도문과 설교 때마다 외치는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씀은 아무 열매 없이 땅에 떨어지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둘째,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세상에 유익을 줄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꼭 필요하다. 교회가 세상에서 분리된 공동체라는 말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졌고, 성도는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산다. 교회는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아니라, 일종의 표본 집단이다. 특정한 인종이나 계층이나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라고 할 때,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공동체라는 뜻이다. 성도들이 죄를 회개할 때 교회에서 지은 죄가 아니라 세상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설교에서 제시되는 죄의 목록을 살펴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술, 담배, 음란, 교회 불출석 등의 개인적 죄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 사이의 질투와 미움 같은 공동체를 해치는 죄다. 이 죄들을 회개하는 것 가지고는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짓는 죄들, 예컨대 화이트칼라 범죄, 차별적인 언행, 동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이념 등을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공동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분열된 세상을 전제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그들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 됨을 이루라고 말씀한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는 비슷한 사람들을 묶어줌으로써 교회에 소속감을 높이려는 것보다는 더 높은 차원을 가진다. 교회는 인종과 신분과 젠더의 차이를 극복한 공동체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어울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동등한 인격이며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과 상처를 가진 죄인들이다. 세상의 모든 신분적 차이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새로운 신분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성도들 사이의 성령 안에서의 인격적 교제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무력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치유는 우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회가 사회적 차이를 극복한다면 이는 세상을 치유할 자격을 갖춘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교회 자체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기관이다. 만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영성을 위하여 유익하다. 아니 유익한 정도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세상 속에서 죄를 짓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은 세상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세상의 죄악과 나의 죄는 서로 얽혀 있다. 나는 마이크로코스모스이고 작은 대한민국이다. 더 깊은 영성을 위하여서는 세상에 속한 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빠져 있기 쉽다. 사탄의 깊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알고 거기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구체적으로 세상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세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선 세상을 알아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또한 변화된 세상 속에서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 시대에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 세계의 변화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각각의 경우에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하도록 하겠다.


        1.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과 위기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코로나19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오던 것이 코로나 기간에 가속화되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10년, 20년에 걸쳐 천천히 변화되었을 것이 단기간에 급격하게 바뀌었다.
        대표적인 변화를 들라면 비대면 문화의 급격한 확산을 들 수 있다. 코로나19가 만연하자 당장에 일어난 변화이다. 바깥에 나가서 물건을 살 수 없으니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온라인으로 쇼핑한다. 어린이와 학생들이 등교할 수 없으니 온라인 수업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 필수 요원이 아닌 직종의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작업지시를 받고 재택근무를 한다. 심지어 예배도 온라인으로 드리게 되었다. 많은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어 실망하기도 하고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10년 전에 팬데믹이 일어났더라면 비대면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비대면 문화의 확산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코로나 훨씬 이전부터 비즈니스나 교육의 영역에서 비대면 문화가 점진적으로 확산하여 오고 있었다. 예배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초대형 교회에서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부속건물에서 영상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여러 캠퍼스가 있는 교회에서는 위성으로 송출된 설교나 녹화된 설교를 들었다. 여러 채널의 기독교 TV들에서는 주일에 여러 차례 예배 실황을 방송함으로 반드시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코로나19로 이런 경향이 광범위하고 빠르게 앞당겨진 것뿐이다.
        코로나19 시대 놀라운 변화의 하나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K-방역의 성공은 눈에 보이는 과학적 성과물과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의료 기술과 IT의 결합, 방역 당국의 공격적인 검사와 성숙한 시민 의식, 실력 있고 자긍심 높은 공무원들의 발 빠른 대처, 정부에 대한 신뢰,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촘촘한 그물망,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국가주의 등이 결합하였다. 방역에 실패한 나라들은 대체로 이런 물리적 혹은 사회적 자본이 하나둘씩 결여하였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것도,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은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화(globalization)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나라일 것이다. 2020년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0위에 올라섰고, 1인당 GDP는 세계 7위다. 2020년과 21년 연속으로 G7 정상회의에 옵저버로 초대되었다.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회원인 그룹A에서 선진국 회원인 그룹B로 격상했다. 이는 1964년 UNCTAD 설립 이후 약 57년 만의 일이자 세계 최초의 사례다.
        K-컬처가 세계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더욱 놀랄만하다. 지난 2019년 초 코로나가 막 시작할 무렵,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에미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6관왕에 올랐다. 비영어권 창작물 중 에미상을 수상한 최초의 작품이다. 칸영화제에서 박찬욱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방탄소년단(BTS)이나 블랙핑크 등의 K팝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위기의 시대
        이러한 발전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는 대단히 불투명하고 어둡다. ‘위기’가 일상화되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 위기다. 코로나19 자체가 기후 위기의 한 징후다.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동물에게만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인간 숙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매년 세계 곳곳에서 지구 온난화의 파괴적 위력을 목도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탄소중립의 목표를 세워놓고, 새로운 에너지 정책을 정립하고, 신재생 에너지를 위한 국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중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탄소중립은 대단히 큰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탈(脫)세계화(De-globalization) 경향도 수출 경제 위주의 우리나라에 대단히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코로나 이전부터 브렉시트(Brexit)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중 갈등과 같은 자국 중심주의 경향이 있어 왔는데 코로나19가 이를 가속화하였다. 팬데믹이 발발하자 각국은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자국 중심의 백신 쟁탈전을 벌였다. 코로나 직후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 세계 곡물과 에너지 가격을 폭등시켰다. 탈세계화 경향은 지난 30여 년 동안 공들여 만든 글로벌 공급망을 파괴함으로 저성장 기조를 확대될 우려가 크다. 게다가 현재 동북아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다. 미중 갈등이 확산하어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신냉전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북핵 위기는 일본의 재무장과 중국의 국가주의와 대한민국의 우경화를 촉진한다. 요컨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가난하고 훨씬 위험한 세계가 될 것이며, 대한민국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위기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미 진행되어 오던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극심하게 만들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초기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코로나가 노동계급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화되었고 주장하였다. ‘재택근무 가능자’(the remotes)는 코로나로 직업을 잃을 우려가 거의 없으며 더 큰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는 전문직에 속한 사람들이다. ‘필수 인력’ (the essentials)는 방역과 의식주를 위하여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힘든 노동을 하지만 보수는 늘어난다. 그러나 ‘무급 휴직자’(the unpaid)이나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 등은 결국 직업을 잃고 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생계를 위협받을 것이라 하였다.
        코로나로부터의 회복도 소위 ‘K자 회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즉 선진국은 더욱 부요해 지고 신흥국은 수출 부진과 인플레와 물가 등으로 외환위기를 맞을 수 있다. 디지털 기반 기업은 더 성장하고 전통적 상공업은 쇠퇴하며, 노동자의 경우도 정규직 혹은 전문직은 소득이 오히려 올라가는 반면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의 경우는 파산에 몰리게 된다.
        사회적 갈등도 점점 심화하여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팬데믹 이전부터 ‘헬조선’이라 불릴 만큼 출생률, 자살률, 행복 지수, 청년 실업률 등 모든 주요 지표에서 OECD 국가 중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손꼽혔는데, 이런 경향은 코로나 이후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수년간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갈등이 심화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이 모여 상대를 부정하는 집회를 열 정도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극심한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경제적 손실을 경험함으로 모든 사람이 분노에 차서 희생양을 찾고 있다. 여기에 소셜네트워크(SNS)의 알고리즘이 유사한 성향의 콘텐츠를 연이어 제공하고 비슷한 유저들을 친구로 추천함으로, 정보는 닫힌회로에서 순환되고 세상은 더욱 분열로 치닫는다.

        번영과 발전: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극복되어야 할 악(惡)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좋은 것들로 가득하게 하셨다. 과거에 한 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 사람은 창조의 능력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들과 물질적 번영은 우리가 즐겨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창조물은 하나님을 거역한 악(惡)의 산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설명하려 하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비대면 문화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비대면 문화는 극복되어야 할 악인가,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현실인가, 아니면 역사 발전과 진화의 한 양상인가? 여기에 균형 잡힌 분별력이 필요하다. 비대면 예배는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성경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우리는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팬데믹의 도전으로 새삼 깨닫게 된 신학적 통찰 위에 우리의 경험을 실제 예배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대면 예배를 폐지하고 무조건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은 현실적이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예배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쉽게 예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혹은 영상매체를 예배에 사용하여 효과를 높이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체와 신체, 얼굴과 얼굴이 마주칠 때 비로소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을 신체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닉네임과 댓글로 소통하는 유저로 남아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명제로 이루어진 이론적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영혼과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비대면 예배는 어디까지나 대면 예배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K-컬처를 생각해 보자.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 인기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시대의 낮은 사람들의 비루한 삶과 좌절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주인공들은 반지하 주택에 사는 사람들로서 부자에 기생해 살아간다. 냄새 때문에 사회적 지위를 숨길 수 없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가 많이 오면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고, 변기에서 오물이 용솟음치며,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영화보다 더 참혹한 일이 발생하였다. 2022년 8월의 서울 홍수 때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세 여성이 참변을 당하였다. 40대 여성과 그녀의 발달장애인 언니, 그리고 13살 먹은 딸이 죽음을 당하였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두려웠을까? 물은 차오르는데, 문을 열 수도 없고, 방범창을 뜯을 수도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119에 신고해도 기다리라는 답변밖에 없고,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도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이들은 추위와 냄새와 공포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익사하고 말았다. 그들의 유류품에는 고구마와 짜파게티와 어린 딸의 필기구와 물에 불어 겉장이 뜯긴 핑크색 성경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슬픔과 원한으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락을 누리시기를.
        “오징어게임”도 역시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잔인하다 싶으리만치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생존의 욕구와 돈 욕심 때문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징어게임의 유명한 대사, 오일남 할아버지의 외침이다. “그만 해,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우리는 지금 다 죽게 생겼다.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묘사하기는 하였지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봉준호 감독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대가로, 바로 그 체제의 정점에 올랐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반지하에 남고, 감독은 손닿을 수 없는 위치에 올라 대중의 ‘리스펙’을 받는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그 게임의 내용처럼 처절한 경쟁을 뚫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섰다. 모르긴 몰라도 감독과 배우와 회사가 번 돈은 456억은 더 될 것이다.
        역사의 전환기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저소득층이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낮은 자의 고통에 동참하며,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면,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민중을 억압하는 강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준다면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회의 문제를 떠안고 약자들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시대를 맡기시기 때문이다. 이 사명을 잃은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밟히며, 추수 후의 포도나무 가지처럼 바깥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2. 탈(脫)종교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에 나타난 일들을 살펴보자.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한국교회는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그 내리막길이 더 가팔라졌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 성도의 숫자는 2011년 정점을 찍은 후 매년 감소하여, 2019년까지 9년 동안 약 139만여 명이 감소했다. 이는 전체 기독교인의 15.8퍼센트에 해당한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중대형교회의 경우 대략 20-30%의 성도들이 대면예배에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소형 교회의 경우,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온라인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였던 교회가 많았다. 만 개 이상의 교회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문을 닫았다. 교회학교의 경우는 더욱 처참하여 대체로 이전의 절반만이 교회를 출석한다.
        더욱더 큰 문제는 교회의 신뢰도가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 1월 기윤실이 발표한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신뢰한다”는 긍정이 31.8%, 부정이 63.9%였다. 20대는 25:75이고, 30대는 15:81로서 더욱 심각하다. 2022년 4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긍정이 18.1% 부정이 75.8%로 신뢰도는 더욱 낮아졌다. 코로나19 이후 종교인에 대한 이미지 조사에서 불교와 천주교에 대한 이미지는 ‘온화한’, ‘따뜻한’, ‘절제하는’, ‘윤리적인’ 등의 긍정적인 응답이 많은 반면, 개신교에 대해서는 ‘배타적,’ ‘물질적,’ ‘위선적,’ ‘세속적,’ ‘이기적’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앞으로의 부흥과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탈종교화
        한국 기독교의 하락은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교회가 보여 준 행태에 대한 대중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탈종교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탈종교화란 간단히 말하여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초월적 존재도 믿지 않는 경향을 말한다. 통계에 따르면 2021년 종교인의 비율은 40%로서 2014년 50%보다 10% 정도 하락하였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의 탈종교화 비율이 높은데, 20대의 경우 종교를 가진 사람이 22%에 불과하고, 30대는 30%다. 2021년 40대의 종교인 비율은 32%인데 이는 그들이 20대였을 때보다 무려 13%나 하락한 수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1947년)는 유럽 사회가 종교(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탈종교 시대로 돌입할 것을 예견한 작품이다. 소설 속 파늘루 신부(神父)는 페스트 창궐이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회개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설교하였었다. 그러나 신부는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지 의문을 품었다.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대재난의 시대에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신(神)을 끌어들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하였다. 대신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한 개인들의 희생적 결단과 연대,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를 구원의 길로 제시한다.
        카뮈의 제안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꽃을 피웠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과학적 방역과 공동체 의식의 결합이 K-방역 성공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교회가 설 자리는 없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의 문제의식과 대응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대면/비대면 예배 논쟁, 신천지 때리기, 정부의 기독교 말살을 위한 음모론, 사랑제일교회 사태, 코로나 이후 축소된 교세를 어떻게 회복할까 등이 의제의 전부다. 모두 교회의 생존을 염려하는 교회 내부의 문제들뿐이다. 교회가 방역을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교회가 어떻게 정부와 협력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지 않았다. 코로나19의 문명사적 의미가 무엇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떠하며, 교회는 어떤 마음으로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지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소수파 기독교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지난 세대 반공주의와 산업화 등 사회적 의제를 기독교가 이끌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여기에 탈종교화 경향까지 더하여 져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줄어만 가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기독교가 사회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시대이다. 세속화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중요한 영역들을 국가와 기업에 내어주고, 기독교는 사적(私的)인 영역에 국한되고 말았다. 교육의 대부분을 공립학교 교육이 담당하고, 가정과 교회는 교육에서 멀리 물러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물리적인 핍박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요컨대 기독교가 여러 종교나 사상들과 경쟁하는 n분의 1의 위치가 된 것이다. 아니 소수파가 되었다.
        베드로전서는 소수파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네로황제 이후 박해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밀려나서 ‘나그네’와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하였다. ‘불 시험’을 당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전서는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1:17하)고 권면한다. 대단히 소극적인 삶의 자세다. 소수파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을 지배하는 정서는 ‘두려움’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해야 하지만, 또한 나의 잘못된 언행으로 복음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삼가야 한다. 황제나 총독의 눈에 거슬리지 않아야 하고, 노예들은 믿지 않는 주인을, 아내들은 불신 남편을 두려워해야 한다.
        소수파 기독교로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우리만의 닫힌 종교, 부족 종교, 가족 종교를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교회는 비록 박해받는 소수의 무리라 할지라도 세상을 위한 왕적 제사장으로서 그 영광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유명한 베드로전서의 말씀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은 소수의 나그네 그리스도인들을 “제왕적 제사장”(royal priesthood)으로 부르셨다. 악한 제국 한가운데서 두려움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사실은 로마제국을 다스리는 왕이요, 로마제국의 신민과 하나님을 중재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제사장이다. 교회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기관이다. 세상은 교회를 미워해도 교회는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사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수파로 살든 소수파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 믿는 사람이 다수파일 때는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고,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고, 교육을 통하여 후세에 전수하며, 이웃 나라들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한 마디로 두려움이 동반된 선행을 보여줌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벧전2:12). 기독교에 적대적인 로마제국의 왕이나 총독, 못된 노예 소유주, 아내를 학대하는 불신 남편과 같은 이들에게도 진정성(authenticity)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을 보이고, 고난 가운데도 소망을 가지며, 그 선행과 소망의 이유를 물을 때는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대답할 때도 온유와 겸손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코로나가 대유행할 때 한국교회가 소수파임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럼에도 대한민국을 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대처 방법이 달랐을 것이다. 먹을 것조차 구하지 못하는 잊혀진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주고, 거의 봉쇄 수준의 대구시(市)에 교계 지도자들이 방문하여 마스크를 전달하며 위로하고, 교회에서 지역 상품권을 발행하여 소상공인에게 도움을 주고, 목숨을 걸고 수고하는 의료진과 방역 요원들을 마음과 물질로 응원하고, 교단의 총회에서 최선을 다해 성금을 마련하여 절반은 어려운 교회에 지원하고 절반은 구호단체에 기부하였다면.... 그러면 지금쯤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배가되고,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을 구원할 희망으로 떠올랐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껏 쌓아놓은 자본이 이것밖에 없으니 누구를 탓하랴.


        3. 신앙과 이념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세 번째 논의는 기독교 신앙과 이념의 관계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적 이념과 정치세력은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어 있다. 보수와 진보는 지난 1990년 삼당 합당 이후 30여 년 동안 엎치락뒤치락 정권교체를 거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정치세력들이다. 두 이념의 대립으로 정치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분야가 양분되었다.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으며,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둘의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되어, 마침내 상대를 악마화하기에 이르렀다.
        부끄럽지만 기독교도 예외 없이 양분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보수/진보 대립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과거 우리가 신학교 시절 7,80년대 만 해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단어 대신 ‘에큐메니칼’, ‘자유주의’나 ‘정통주의’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둘러싼 대립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것으로서, 주로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이슈 중심의 대립이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등 초자연적 구원을 중요시하는 반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성경 비평을 인정하고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1990년 어간 점차 신학적 보수/진보 대립이 정치적 보수/진보 대립과 맞물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출범함으로 진보적 연합기구인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 운동이 주도한 햇볕정책 반대 시위를 시작점으로 신학적 보수와 정치적 보수가 맞물린 기독교 보수주의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후 태극기 집회, 기독교 정당운동,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건국절 논쟁 등에서 보수적 기독교는 정치적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또한 동성애, 이슬람, 세월호, 촛불혁명, 검찰개혁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이에 개입하였다. 코로나19 시대는 한국교회가, 최소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념적으로 우(右) 편향되었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더욱 고착되는 시기였다.

        신앙과 이념의 관계
        이념과 기독교 신앙은 어떤 관계를 가져 왔으며 또한 가져야 할까?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리에 비추어, 서너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기독교 신앙은 이념의 기초를 제공한다. 종교는 자신이 가진 보편적이며 궁극적 가치를 세상에 펼치기 위하여 정치적 이념이 필요하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란 단지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함을 포함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능한 방법은 바로 기독교가 정치이념을 하위개념으로 두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 두 정치세력은, 인정하든 안하든, 모두 기독교적 가치로부터 출발하였다. 보수주의의 가치인 도덕과 규범에 의한 정치, 가족의 소중함, 자기실현에의 열정, 기업가 정신, 노블리스 오블리주, 애국심, 희생정신 등은, 그 뿌리가 영미의 복음주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며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진보적 가치도 성경에서 유래한다. 정의로운 세상, 가난한 사람과 소수자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 부가 대물림되지 않는 경제제도, 평화를 지향하는 정치,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향하는 에너지 정책 등이 진보적 가치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이념과 정치권력을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너무 높고 이상적이어서 현실의 이념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정치인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갈라치기나 선동정치 혹은 적대적 공생관계를 분별해야 하며, 청지기 정신을 상실한 천민자본주의를 비판적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보수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보수 세력이 과연 원래 기독교에서 출발한 보수주의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평등·평화의 가치는 진보적 정치이념의 기반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와 진보적 정치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진보적 정치인도 기득권층으로 편입되면서 자본주의가 주는 유혹과 불안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이 가진 이상주의(idealism)는 좋은 것이지만 때로 무책임할 때가 있다. 예컨대 진보주의자들은 청소년도 성(性) 문제를 이해하고 판단할 능력이 있으니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 관련 범죄를 낳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보 정치 뿌리의 한 갈래는 기독교에 뻗쳐 있지만, 또 다른 갈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에 뻗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신앙은 이념 간의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치기 위하여 정치이념과 함께할 뿐 어떤 특정한 정치 체제나 이념이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고 믿는다. 기독교는 절대성과 궁극성과 보편성을 가지지만, 기독교의 가치를 품고 있는 이념은 상대적 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변동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극단의 이념대결을 벌일 때,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봄으로써, 각각의 이념들을 상대화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이념에 의하여 왜곡되고 기울어진 공론장(公論場, public sphere)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객관성과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내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할 수 있는 지혜와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넷째,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이념을 상상해야 한다. 기술의 진보와 이에 따른 의식의 변화, 재난과 위기 등의 요인 때문에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사람은 그 변화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구시대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죄악의 낙을 누린다. 현실 정치를 알면서도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또한 늘 고통당하는 자들의 자리에 함께 있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왜곡된 구조를 개혁함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꿈을 꾸기 마련이다.
        과거의 보수적 이념과 일체를 이룬 한국교회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기독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소수파가 되었다는 것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정치이념을 상상하는 대신,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 할 뿐인데, 이는 기독교의 하락을 더욱 재촉한다.

        신앙과 이념이 동일시 될 때
        현재 많은 교회가 신앙과 이념을 너무 밀착시켜 동일시하는데,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교회가 떠안게 된다.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 성도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심화된다. 매스컴의 보도를 보면 개신교인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그중 적지 않은 숫자가 극우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계조사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개신교인 정치적 성향은 진보 31.4%, 중도 39.8%, 보수 28.8%로 나타났다. 즉 기독교인의 이념 지형은 일반 국민의 정치 지형과 비슷하거나 진보가 약간 높고, 고연령층이나 지도층은(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매스컴을 통하여 보여지는 인상보다는 개신교인 가운데 진보층이 두텁다. 성도들 가운데 보수, 중도, 진보가 고루 분포하고 있기에, 교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정치적 성향이 다른 성도는 교회를 떠난다.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경향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교회에 대한 충성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2년여에 걸친 비대면 예배 때문에 목회자와 성도, 또한 성도들 간의 교제가 약화되었다. 목회자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쉽게 교회를 떠난다. 특히 초중등학교 학부모인 3,40 대의 경우 진보적 성향이 강한데, 이 사실이 교회학교가 약화하고 있는 것의 중요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교회를 떠난 성도는, 많은 경우 다른 교회로 적을 옮기는 대신, 인터넷을 떠돌며 설교만 듣든지 아니면 가나안 성도가 되고 만다. 혹은 아주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셋째, 신앙이 이념의 하나로 변질하여 결국 교회는 타락하고 복음은 상실되고 만다.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면 타락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모든 권력은 타락하고 그 권력이 절대적일수록 절대적으로 타락하는 법인데, 종교와 정치를 결합한 전체주의 체제가 순수하게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내적으로는 사회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자유를 억압하고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격리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우월한 체제를 전파한답시고 전쟁을 일으켜 인류 역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한국 기독교가 철 지난 이념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함으로 새로운 정치이념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에 역행하는 반동 세력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만일 한국 기독교가 지금과 같이 과거 이념에 매몰되어 미래의 문제에 눈 감는다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소망을 찾으란 말인가.


        결  론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공동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성이다. 공동체성이 구심적이라면 공공성은 원심적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방향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긴밀한 관계다. 구심력이 없으면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고, 원심력이 없으면 안으로 쪼그라들 것이다.
        오늘날 셀 교회, 가정교회 등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의 참여가 없는 공동체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줄 수 없음은 물론 공동체 자체가 게토화(化) 되고 만다. 교회가 단지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살던 성도들의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문제로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공동체를 통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공동체 안에서의 영적 능력을 통하여 해결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에 펼쳐질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암울한 세상이 될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회적 분열과 갈등, 민족주의적 고립의 심화, 기후위기 등이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이미 나라를 반으로 가른 보수와 진보 세력이 더욱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마침내는 내부적 결속을 위하여 외부(북한, 일본, 중국)에 적을 만들고 타 문명과의 대결과 전쟁의 위협으로 나아간다.
        이 모든 문제에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답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동력이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셨다. 교회 자체의 존속과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는 쇠퇴하고 소멸하고 만다. 소금은 녹아서 맛을 내어야 하고, 빛은 등경 위에서 빛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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