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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 기독교의 정치참여 어디까지?-박종화 목사
한복협  2009-07-01 11:16:39, 조회 : 10,255, 추천 : 1710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

                                                         박종화(경동교회 담임목사)

1. 문제의 제기 :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

신앙공동체인 교회와 현실정치와의 상관관계를 규명할 때 채택할 수 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특별히 누가 한 말이라고 인용할 필요도 없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 곧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일 것이다. 위에 제기된 주제와 관련해서 말하면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는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생기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정치가 교회를 필요로 한다거나 또는 교회가 정치적 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교회는 이 복음의 구현체로 부름 받았고 보냄 받았다. 정치는 복음의 요체나 알맹이(Quintessenz)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한 귀결이요 산물(Konsequenz)이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 선포와 실천을 생명으로 삼는 한 교회가 정치적일 수 있느냐 없느냐(Ob)는 것은 전혀 문제제기의 대상일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교회의 복음에 입각한 행위가 어떤 방식(Wie)으로 정치적이어야 하느냐(Wie)가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교회현실에서 신앙노선이나 신학적 성향에 따라 보수교회와 진보교회로 편의상 구분하여 정치문제와 연관시켜 말할 때 보수교회는 비정치적이요 진보교회는 정치적이라고 흔히들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가설로도 실제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말해서 ‘비정치적’임을 자임하는 교회는 ‘보수적-정치적’일 것이고 ‘정치적’임을 자임하는 교회는 ‘진보적-정치적’이라고 성격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행위에서 초연한다거나 정치적 선택을 요구받을 때 중립을 표방하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립도 역시 정치행위이다. 그것은 마치 찬반투표에서 중립을 내세우는 기권도 역시 투표행위요 투표결과에 영향을 행사하는 현실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할 때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가 “어떻게” 정치적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신학적 피전제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자신의 삶 속에 그 나라를 체화하셨는데 그 결과 생겨난 역사적 실체는 바로 교회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상관관계를 상론할 계제는 아니지만 단순도식화라는 무리를 전제한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Autobasileia : Origenes)의 역사적 실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란 예수 그리스도가 체화하고 구현한 하나님의 정치에 부응하는 역사적 실천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예수를 통해 육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성육신의 정치적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화라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 동참함이 바로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의 근간이다. 여기에서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과제가 함께 취급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교회가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실체(Sociality)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역사화된 때문이다. 또 하나는 교회는 역사적 사회성에 머물지 않고 초극하는 종말적 정체성(Identity)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미 역사화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은”미완성이요 완성을 향한 도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갖는 양면성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교회가 세상에 있으나(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 않는(not of the World)다는 (요한 17, 14. 16)양면성이 바로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의 방안인 것이다.

2. 정치적 책임 : “세상을 위한 교회”

아래에서도 다시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로서의 공동체적 책임과 참여를 논하려 한다. 후자의 경우는 그 안에 전자를 포괄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실질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그동안 오류를 범해 왔다고 본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개인주의화시킴으로 인하여 개인구원이 아닌 세계구원의 역사를 제외시킨 데서 오는 인간적인 자의적 오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와 역사의 전개 과정을 통째로 국가나 통치 집단에 일임함으로 인하여 그것들이 자신의 권력행사를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특히 그것들이 여러 형태의 억압적 독재체제로 권력을 뒤흔드는데도 신앙의 입장에서 전혀 비판과 저항을 못할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개개인 역시 복음에 입각한 구원받은 삶을 통째로 박탈당하고 만 경험을 우리 자신들이 수없이 경험하고 있는데 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동시에 세계의 주인이시고, 개개인의 구원자요 동시에 사회의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한 세계의 하나님 앞에서의 공동체적 책임은 물론 교회의 공동체적 책임을 방기할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신앙의 경전인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과 정치 내지는 교회와 국가의 상호관계를 살펴보자. 신양성서에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만 언급되어 있을 뿐 교회가 취할 입장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과 교회의공적인 정치적 책임을 구별하는 것도 성서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대로 정치적 권위에 복종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우선적으로 일상생활의 세속적 의무를 방기할 것이 아니라 성실과 책임성 있게 수행하라는 점이 강조된 것임과 아울러 국가가 사탄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데 대한 경고를 요한계시록 13장과 연계하여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 정치적 책임을 오고 있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빛에서 수행해야 하며 그것은 곧 국가의 체제와 통치형태가 신격화되고 절대화되어 악마화 되는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의 복종의 윤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마르 12, 17)는 말씀의 바탕 위에 선다. 이 말은 곧 신앙과 정치 또는 교권과 왕권의 맹약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이사에게는 그에게 속한 것 그 이상을 돌리지 말며 더욱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종교적 개인적 차원에 국한시키고 정치영역에서는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니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곧 책임의 “영역별” 구분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질적 제한성” 즉 “국가가 인간의 자유와 평화 및 정의를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빛에서 구현케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바로 ‘영역분리’를 주축으로 하는 루터의 ‘두 왕국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예컨대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이 ‘두 왕국론’을 오도하여 전체주의로 치달을 때 독일 고백교회가 국가권력의 ‘질적 제한성’을 강조한 ‘그리스도의 왕권론’을 들고 나와 나치에 대항하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정치적 책임이란 본회퍼가 말한 대로 ‘타자를 위한 교회’의 실천적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만민을 위한 구원’의 봉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위함의 실천’은 바로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봉사(Diakonia Dei)의 단면이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이란 바로 일종의 정치적 디아코니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디아코니아가 어떤 형태를 띠느냐에 있다고 보겠다.


2. 1 ‘두 왕국론’에 나타난 책임의 형태

콘스탄틴 이후 중세기의 교회는 왕권을 교권에 종속시킨 이른바 신정통치 형태의 총괄적 정치실체 역할을 했다. 신앙적 종교적 책임만이 아니라 정치적 세속적 책임을 한꺼번에 걸머진 셈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왕국이라 할 수 있는 Corpus Christianum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종교개혁은 두 가지 의미의 해방을 뜻한다고 보겠다. 곧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의 두 측면이다. 하나는 교회를 세속정치와의 결탁에서 해방시킨 일이고 세속정치를 교권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일이다.
루터는 본래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의 이분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다시 ‘하나님의 지배’(Regnum Dei)와 ‘악마의 지배’(Regnum Diaboli)로 명명한다. 여기서 다시 루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영적인 통치영역’(=교회)과 ‘세속적 통치영역’(=국가)으로 분역화시켜 이 두 영역이 악마의 통치와 싸우는 역할분담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에 대한 총체적 도전과 저항보다는 오히려 영적 통치영역과 세속적 통치영역에 각기 도전과 저항을 한다는 점에서 통치영역별로 보면 오히려 영적인 통치영역, 세속적 통치영역, 사탄적 통치영역이라는 실질적인 ‘세 왕국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제기된 주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장단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선 루터가 영적 통치영역은 신앙과 복음에 의해 움직이며 세속적 통치영역은 칼과 율법에 의해 움직인다고 봄으로써 교회의 정치화와 정치의 교회화라는 잘못된 틀에서 해방시킨 점은 분명히 공헌에 속한다. 동시에 악마의 통치에 대항한 역할분담이라는 점도 수긍할 만하다고 본다. 하지만 ‘두 왕국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보겠다. 첫째로 하나님이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통치하지만 정치에서는 그리스도 없는 율법을 통하여 통치하신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기준이자 실체인 그리스도의 현존을 교회영역에 국한시킨 결과가 되어 세속정치 영역에서의 신앙적 판단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는 문제가 미결의 문제로 남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루터가 말하는 ‘율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불분명하다. 예컨대 그것은 국가마다 지닌 헌법이나 법률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대성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규정이나 법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 내지 신격화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특히 독재나 전제정치 체제를 지탱하는 악법이 있어도 교회는 복음의 빛에서 이를 공박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상실케 만든다는 점이다. 소위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악법은 물론 전제통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고 자행할 때 ‘두 왕국론’이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었을 뿐 전혀 반 나치투쟁에 나서지 못한 함정이 되고 만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두 왕국론’이 현실적으로 이원론적인 정교분리로 귀결되면서 신앙과 교회를 개인적 차원 내지 영적 차원으로 축소해 버리는 결과를 빚어낸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Christperson)으로 행동하며 정치에서는 ‘세속인’(Weltperson)으로 행동하면서 쌍방통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역할분담을 넘어 부도덕한 ‘이중윤리’(doppelte Moral)를 배태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모두에 제기된 문제 곧 교회의 ‘정체성’은 세속정치와의 영역 내지 역할분담 속의 영적 실체로서의 정체성에 머물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정체성이 지니는 ‘종말적’공동체성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그리스도가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이긴 승리의 빛에서가 아니라, 사탄과의 영속적 투쟁을 강조함으로써 ‘승리’를 묵시적 미래의 지평으로 이관시켜 버리는 결과를 빚어낸다고 보겠다.
또 하나 모두에서 제기된 교회의 ‘사회성’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적 공동체로 자기축소를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사회적 실체됨을 유보하여 ‘개인종교화’(Privatreligion)되거나 또는 반대로 기존의 세속적 가치체계나 정치체제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정치종교(politische Religion)화될 가능성이다. 앞서 잠깐 살펴본 대로 나치 치하의 교회모습이 바로 이 후자의 모습을 띠게 된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2 ‘그리스도 왕권론’에 나타난 책임의 형태

‘그리스도의 왕권론’은 신학적으로는 개혁파 전통에 속하며 그것이 제기된 역사상황적 계기는 히틀러 치하의 ‘고백교회 운동’과 일치하며 동시에 「바르멘 신학선언」(1934)의 기조가 된다. 실제로 고백교회의 반나치 투쟁의 슬로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었다. 그것은 루터의 ‘두 왕국론’처럼 그리스도인이 두 통치영역에 동시에 몸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이 모두 그리스도의 절대주권하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말은 분명히 히틀러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학적 도전이며 동시에 정치적 저항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물론 교회공동체의 정치영역에서의 행동약식의 푯대로 삼게끔 했다.

우리는 고백교회 운동을 통하여 본회퍼의 저항운동과 바르트의 신학운동을 기억한다. 여기서는 1934년 6월 10일 ‘바르멘’에서 바르트가 기초한 것을 수정토의를 거쳐 고백교회 총회가 채택한 6개 조항의 「바르멘 신학선언」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왕권론의 실체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 모두를 용서하신다는 약속이듯이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겠다는 권리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린 이 세상의 여건에서 해방 받아 그가 피조물을 향한 자유로운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봉사를 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어떤 주인이 지배한다는, 즉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하심과 거룩과 하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의 거짓 주장을 배격한다(2항).

여기에 대칭되는 정치 종교화된 친 히틀러 교회(=Deutsche Christen이라 칭함)는 1933년 12월 11일 공포한 교회 장정에서 “어느 민족에게나 그렇듯이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을 허락하셨다. 그 법은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총통이 형성한 나치체제에서 구현된다. 이 법은 같은 핏줄과 땅에서 성장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효력을 발생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교회는 ‘복음’으로, 국가는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고 루터가 말했을 때 ‘율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애매모호하게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을 비판한 바 있다. 여기서 보듯 ‘율법’은 곧 ‘총통과 총통이 만든 나치체제’로 규정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루터의 ‘두 왕국론’이 어떻게 나치교회에 의해 악용되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그 실상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1. 히틀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도움을 주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강건케 하신다.… 2.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발현하는 자이다. 루터교적 신앙의 용기로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옛 돌(성서와 신조)과 새 돌(인종과 민족주의)을 받침삼아 이 교회를 신앙으로 지키고 건설해 갈 것이다.”

이미 나치정권하의 독일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한 종말적 ‘정체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 교회가 지닌 역사적 ‘사회성’의 모습은 극단의 정치 종교적 특성을 지닌다. 그 실례를 들면 이러하다.

1. 우리는 한 민족 한 왕국 한 신앙이라는 기본전제에서 독일 나름의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따라 통일된 독일 민족교회를 설립할 것을 맹세한다.”(1933년 12월 18일자의 「교회장정」) 2. 우리 루터교회는 민족의 연대성을 위하여 나치국가와 정교분리 계약을 맺을 수 없다. 민족교회는 이 국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노선을 신뢰하고 받드는 자만이 교회를 이끌어 갈 권리가 있다. (1933년 12월 29일「교회장정」) 4. 신앙과 참된 정치(결코 정당정치도 교회정치도 아닌)는 구별될 수 없다.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데에는 국가와 교회는 동일하다. 5. 국가는 밖으로 독일 민족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도구요 교회는 내적으로 독일 민족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1934년 3월 「교회장정」).

이에 반해 바르멘 선언에 명기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띤다.

국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적 통찰력 인간적 역량이 허락하는 한 폭력의 위협과 폭력행사로부터 보호하여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라는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성서가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정의를 기억케 함으로써 동시에 다스리고 다스림 받는 자들의 책임을 일깨운다 ….
우리는 교회가 그 나름의 특별히 부여받은 임무를 넘어 국가적인 일, 국가적 과제 및 국가의 명예에 관한 일을 자기일로 삼아 스스로를 국가의 한 부속기관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또 전락해야 한다는 거짓 주장을 배격한다(제 5항).

결국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왕권론’이 말하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는 바로 예언자적 정치 비판적 과제를 그 실체로 삼게 된다. 신학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분명히 승리자 그리스도의 왕권이다. 이 점이 바로 미완의 투쟁 속에서 파악하는 ‘두 왕국론’의 그리스도 이해와 다른 점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인 그리스도의 주권은 정치, 사회적 측면이 빠진 신자들의 영적인 삶에 역사하는 내면화 성향을 띠는 데 반해서 ‘그리스도의 왕권론’에 담긴 그리스도의 주권은 분명히 영적․정치적 차원을 동시에 포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승리자 그리스도를 강조하되 그것이 곧 열광적 승리주의 내지는 또 다른 신정정치의 출발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부활의 승리는 아직은 완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승리의 현장이 여전히 십자가의 고난의 한복판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의 문제와 연관시켜 말하면 교회의 ‘정치 종교적’ 위상을 정치 비판적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뒤바꾸는 일이 하나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책임을 고난 받는 이웃과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실체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위로부터의 지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봉사라는 말이다. 필자는 이것을 승리자 그리스도의 주권을 바탕으로 삼는 고난 받는 민중과의 연대공동체라 규정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참여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타자를 위한 삶’의 방식에 따른 결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3. 정치적 참여의 형태 : ‘선택적 결단’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복음전파의 구체적 귀결로 파악할 때 그 구체적인 형식은 어떤 것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한국의 교회와 정치 현실에 있어서 바람직한 정치적 참여의 형태를 찾아보는 일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모든 종교집단이 그러하듯 교회 역시 ‘국교’형태의 참여방식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우리의 국가와 종교가 다같이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점은 바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곧 국가와 교회의 분리 원칙일 것이다. 이미 헌법에도 명시된 대로 정교분리는 우리 교회의 정치적 참여방식의 기본 전제임에 틀림없다. 다만 정교분리의 원칙 속에 담긴 두 가지 요소를 여기서 밝히고 지나가 보기로 한다.
첫째는 그것이 국가의 자율성과 주권의 불가침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교분리 원칙이다. 주권자의 위치를 정한 국가에 대해 교회는 일종의 부속적 위치를 점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교회는 공권력에의 참여가 불가능하며 또 예컨대 서구 교회 일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종교세’ 징수 등이 용인되지 않는다.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헌법상 보장받는 민간단체적 법인의 위치를 지닌다. 둘째는 자유주의적 해석의 관점으로 교회가 자체의 조직과 위상을 침해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자유와 공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의 정교분리이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이 두 가지 차원이 각기 오도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교회가 공식적으로는 아니나 비공식적으로 국가나 지배 이데올로기 및 기존 가치체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 주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정치종교’ 내지는 ‘시민종교’의 위상을 음양으로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용어로 말해서 지배구조에 순응하는 ‘호국종교’ 내지는 ‘애국종교’로서의 위상정립을 요청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입각한 교회의 정치참여 형태일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교회 스스로 일종의 정치적 ‘게토’로 자기축소를 지향하는 성향이다. 영적 공동체만으로 자기의 위상을 정립하는 경우이다. 앞서 누차 지적한 대로 복음에 입각한 교회는 결코 개인차원의 사적 종교로 전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교분리라는 기본구조 속에서 교회의 공적, 정치적 참여의 형태는 어떤 것들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을 문제로 제기하고 논의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사회단체’(societas)로서의 참여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정치’에의 참여형태이다.

3. 1 ‘사회단체’로서의 참여형태

교회가 법적으로 등록된 민간종교단체임에는 틀림없다. 오늘날과 같은 복합사회의 여건 속에서 교회가 지니는 ‘사회단체’적 특성을 여타의 사회단체들과 견주어 분명한 자기정립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교회는 일반 사회단체가 지니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과정을 통한 자기보존의 틀에 매이지 않는다. 예컨대 산업사회의 여타 사회단체들이 실적경쟁을 통한 자기존립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사회단체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교회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학적 ‘정체성’에서 계획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한 가시적 구현체로서 세계구원 및 사회구원을 향한 “화해의 봉사”(고후 5, 18-19)라는 헌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교회의 성격상 한 국가와 문화나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적 에큐메니칼 연대공동체라는 점이 다른 특색이다.
이러한 일반적 원칙에 따라 사회단체로서의 참여형태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먼저 독일의 경우와 미국의 경우를 실례로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독일의 경우를 보자. 국교가 아닌 ‘국민교회’(Volkskiche)라 지칭하는 틀에서 몇 가지 독특한 참여방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에 일종의 ‘전권대사’를 파송한다. 그들의 위치는 외국의 외교관의 위치에 준한다. 나아가 각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에도 같은 형식의 ‘전권대사’를 파송한다. 또 다른 하나는 국가와 정부 상호간의 계약으로 국공립학교에 ‘성경과목’을 선택필수과목으로 개설하고 이를 정규과목화하며 국가(또는 지방정부)는 이에 대한 교육법적 내지 재정적 보상을 한다. 기타 공영방송국, 교육위원회, 공영복지기관 등에 민간참여의 폭을 늘린다는 전제하에 일정 부분의 위원직이 배당된다.
미국의 경우는 교회의 사회 단체적 역할을, 이미 사회전반에 일반화된 대로 일종의 ‘로비집단화’를 통하여 하나의 참여형태를 구체화하고 있다. 예컨대 개신교 각 교파가 연합으로 「교회 입법대표부 워싱턴 합동사무소」(Joint Washington Staff of Church Legislative Representatives)를 1945년부터 설치 운영하고 있음이 이채롭다.
한국 상황에서 볼 때 독일의 ‘전권대사’ 파송이나 미국의 ‘로비단체화’와 같은 형식으로 채택될 수 없겠지만, 예컨대 국회와 광역 및 기초단위 지방의회 등에 가칭 ‘의정감시단’을 파송하여 교회의 공공적 책임의 일단을 구조화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이런 문제는 민간차원의 감시 활동적 참여폭의 확대가 법적으로 보장되고 최소한 여타 종교단체와의 형평 원리에 따른 제도적 보장이 마련된다는 전제하에서이다. 특히 앞으로 심화 확대될 지방화 시대의 전개를 보면서 다양한 참여양식을 연구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교회 나름의 복지와 봉사활동은 물론이지만 공공복지 및 사회교육 기관에도 인적 물적 차원의 참여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우리 사회의 커다란 질병이라 할 수 있는 정치도덕의 타락 내지는 사회도덕의 타락을 설교를 통한 선포의 방식만이 아니라 공공정책 결정과정에의 참여를 통하여 기독교적 이상을 구현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바로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원론적이나, 도덕적 권위와 설득력 있는 연합된 발언과 선언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조직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신학자․전문평신도를 망라한 전문가집단의 공동결집을 먼저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교파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봉사의 사안에 따른 에큐메니칼 프락시스의 훈련에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3. 2 ‘정당정치’에의 참여문제
정치참여가 반드시 정당 정치적 참여일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그러한 참여를 거부하거나 막을 이유도 없다고 본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기존 제도권 정당과 연대하는 참여의 방식이다. 이 경우는 ‘정책’에 따른 사안별 선택적 참여가 바람직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단일정당이 아닌 다당제 하에서 교회가 최선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정책실현을 위해 특정정당과 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둘째로는 교회가 나름대로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되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본다. 이런 경우 필자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뺀 그리고 기독교적 색채를 주장하지 않는 정책정당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서구라파와 같이 전통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삶의 양식으로 정착된 상황과는 달리 우리의 상황은 분명히 다원종교의 상황이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서구에서조차 정당명칭에서 ‘기독교’를 삭제해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는게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당정치적 참여의 목적이 정치의 기독교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관의 포괄적 실현에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기독교’라는 간판 자체가 뜻은 동조하면서도 외향적 거부감 때문에 가능한 동참의 길을 처음부터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장전략의 일환이라거나 일시적 미봉책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정당창당적 참여는 기본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일종의 ‘익명적 기독교’(K.Rahner)의 정치적 원용형태이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 여건으로 미루어 보아 정당정치적 참여에 관한 한 필자는 기존정당에 대한 선택적 연대방식이 더욱 시급하고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문민 민주정치 시대를 함께 만들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대안이라 믿기 때문이다. 정당 창당의 문제는 그러한 민주정치 시대가 제도적으로 자리하며, 선거공영제를 통한 정책 대결적 정당구조가 정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을 기울인 연후에 심각하게 고려해 볼 사항이라 생각한다.
이와 아울러 진정한 문민 민주정치론의 진입과 동시에 민족통일의 성취가 단계적으로나마 근접화되리라는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면서 교회의 정치적 역할은 자못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은 단순히 국토통일의 차원을 넘어 포괄적인 의미의 사회통합을 위한 정치 사회적 정책개발과 상응하는 가치관의 실체화, 문화, 예술, 교육 차원의 통합노력 등에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전문 인력과 정책구상과 대중적 참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미 통일의 벅찬 감격이 몰고 온 독일의 통일 이후의 산적한 문제점들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준비와 결단을 간접적으로나마 재촉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정치참여는 선교의 중요한 영역으로서 복음에 입각한 제사장적 위로와 예언자적 비판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 다만 정당구성을 통한 참여는 오히려 복음의 정치적 타락을 가져올 공산이 훨씬 크다는 서구사회의 정치실험 결과를 유념하여 비정당적 내지 정책 대안적 참여를 취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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